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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엣지X비욘드 로컬] 100년 된 쌀 창고, 128명의 취향이 담긴 서점이 되다 - 공유서점이자 문화 커뮤니티, 포도책방

2026-07-08

‘나이 들어 고향에 내려가면 책방을 내야지!’ 내 또래의 로망이기도 한 이 소원은 나에겐 명제에 가까웠다. 30대에는 희미하게, 40대에는 어렴풋이 생각나던 것이 50대가 되자 빛의 속도로 각인되었다. 


로망이 목표가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왜냐하면, 이 나이에 망하면 끝이라는 강박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책방을 준비하고 열기까지 지난 1년은 강박과 설렘의 무한루프였고 얽힌 실타래는 점점 난해해졌지만 또한 단단해졌다. 이제 한 박자 쉴 때가 됐으니 즐거운 미궁의 실타래가 어떻게 엮여왔는지 역으로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PLACE : 퇴적의 진화, 장소성의 전환


첫 번째 고민은 ‘어디’였다. 이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 책이 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책 『세계서점기행』은 “종로는 종로서적이 있어야 종로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목포는 ‘원도심’이지. 결정은 빨랐지만 고민은 깊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넘치는 종로와 달리 목포 원도심은 예전에 흥했지만 지금은 그 위상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목포 원도심은 황금기 시절 책방이 넘쳐났다. 인근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목포에 와서 책을 샀고, 책방은 갤러리와 공연장이 되기도 했으며, 늘 토론장이었다. 단지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배회 동선’이었고, 지금은 아무도 배회하지 않는 곳에 굳이 찾아오게 만들어야 하는 ‘목적 동선’의 타깃이 되어야 한다.


타깃이 되려면 장소성을 가져야 한다. 도시는 장소들의 합이고 도시력力은 장소에 쌓인 퇴적층의 두께와 질의 합이다. 각각의 장소는 저마다 쌓은 퇴적층의 특성을 갖고, 그중 몇은 특별한 장소성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여행지로 삼는 도시들의 공통된 특징은 특별한 장소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소성에도 유형이 있는데, 그랜드캐니언 같은 ‘자연’, 에펠탑 같은 ‘명소’, 분단의 장벽 같은 ‘사건’, 1년에 동전으로만 40억을 번다는 트레비 분수 같은 ‘행위’로 나눠볼 수 있다. 여기에 현재는 도시생활자들의 접촉으로 만들어지는 ‘취향 공유’ 공간으로서의 장소성이 추가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책방은 어떤 장소성을 가져야 하는가.


554633ca80975.png(왼쪽부터) 목포 간척의 역사와 원도심 지도, 서점 내부 전경. 포도책방 공간은 첫 번째 간척지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에 자리 잡은 100년이 넘은 쌀 창고였다. 유동 인구가 줄어든 이곳에 책방을 내면 안 된다는 말도 들었지만, 황금기 시절 책방이 넘쳐났던 원도심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었다.


첫째, 가장 원도심다워야 했다. 포도책방이 자리 잡은 곳은 100년이 넘은 쌀 창고다. 일제강점기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로 지어져 수탈한 쌀을 쌓아두었고, 해방 이후 소금, 해산물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다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 목포의 수산업이 발전하면서 수협은행으로 사용되다 수협이 이전하며 다시 방치된 곳을 몇 해 전까지 독립영화관으로 사용했고 다시 비어 있던 곳.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둘째, 반복할 ‘행위’와 공유할 ‘경험’이 필요했다. 앞서 말했듯 장소성은 ‘반복’과 ‘공유’의 산물이다. 트레비 분수 앞에 가면 누구나 동전을 던지고, 홍대 앞에 가면 누구나 힙스터가 되는 상상에 빠지듯 반복하고 공유할 것이 필요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남의 집 책 구경이었다. 집들이에 가서 그 집 책꽂이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감이 오게 마련이다. 내가 읽은 책이 많이 보이면 동질감까지 느껴진다. 들여다보기는 언제나 묘한 설렘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들여다보기의 다른 쪽 면인 내보이기는 어떤가? 서로를 들여다보고 내보이는 행위의 반복. 챗GPT 이후 지식 축적 도구로서의 면모를 상실해 가는 책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더 아날로그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은 낭만을 한 방에 걷어찼다. 책방을 내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 거기다 냈냐는 말이었다. 하당이나 남악 같은 신도시에 내야지 사람도 안 다니고 찾아가기도 힘든 곳에, 심지어 젊은이도 학생도 없는 곳에 책방을 내면 안 된다는 걱정 반 우려 반의 반응이 넘쳤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의 출판과 서점에 관한 데이터를 무수히 들여다본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우리나라 최고의 입지에 위치한 교보문고도 적자를 보고 있다는 데이터는 ‘책을 안 읽는 시대에 목 좋은 곳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느니 소수라도 꼭 찾아오는 곳에 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며 낭만을 선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소를 정하기 위한 마지막 과제는 기존의 장소성에 ‘새로움’을 덧댈 수 있는가였다. 100년도 넘은 목조 트러스가 가진 아름다움과 일제강점기 쌀 창고라는 역사는 좋은 조건인 동시에 넘기 힘든 산이다. 예쁜 책방은 할 수 있어도 매력적인 장소성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단순히 남의 책장을 들여다보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한 번쯤은 재미있게 둘러볼 수 있겠지만 반복을 유도하고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했다.


SPACE : 다양성의 쓰임, 쓰임의 다양성


장소를 원도심의 오래된 창고로 정하고 ‘장소성’을 책보다 책을 보는 사람에게서 찾자는 원칙이 정해지자 다음 단계인 ‘공간’이라는 험난한 고개가 나타났다. 공간은 저마다 특성을 갖는데 책방이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성은 다양성이다. 책방이나 화방에 가면 누구나 조금씩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다. 칙칙한 일상을 벗어나 울긋불긋 각자의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다양성의 바다’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교보문고를 책의 숲이라고 인식한다면 독립서점은 꽃 한 송이 뚝 떼어낸 화분 같은 느낌이다. 유럽의 책 마을처럼 작은 책방들이 모이면 서로 손님을 빼앗는 게 아니라 시너지가 난다는 통계는 그렇게 모임으로써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책방의 본질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70평 창고 공간에 어떻게 다양성을 집어넣을 것인가.


이 지점은 ‘장소성’에서 고민한 책 읽는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같은 책을 읽은 다른 느낌이 공유된다면, 각자의 소중한 주제와 관심이 모아진다면,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책을 권해준다면 책방이 가져야 할 다양성의 일부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 세워졌다. 이 가설이 현실이 되려면 책장을 최대한 잘게 쪼개야 했고 형태도 다양해져야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하게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eb6fe95371573.png포도책방의 시그니처가 된 원형 책장과 다양한 문화 행사.


이 고민의 결과로 시그니처 책장인 원형 책장이 만들어졌다. 원형 책장의 서가를 한 칸씩 임대하여 각자의 취향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서점을 운영할 수 있게 했다. 포도책방에 들어온 손님이면 누구나 탑돌이를 한다. 여느 책방 같으면 평대부터 둘러보겠지만 포도책방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탑돌이를 하고 평대로 향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의 일반적 특성이 다양성이라면 현재 시점의 책방이 갖는 공간적 본질은 놀이터에 가깝다. 지식을 습득하는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책은 점점 다른 위상을 갖게 되었고 책방 또한 그에 맞게 진화 중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반려문화다.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에서 반려식물, 더 나아가 피규어 같은 것들이 반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그 대상이 책으로 확장되는 중이다. 여행지에 가면 책방을 검색하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사서 읽은 다음 집에 돌아가 책장에 소중히 모신다. 나의 여행 기록이자 추억 도서관이다. 책이 지식 습득이 아니라 반려문화, 즉 라이프 스타일과 연계된다면 책방도 단위면적당 얼마나 많은 책을 채우느냐보다 어떤 공간이고 어떤 분위기인지가 중요해진다. 책방은 이미 미술관이, 공연장이, 강의실이, 놀이터가 되고 있다. 취향이 담긴 공간을 추구한다는 츠타야 서점 이전부터 이미 이런 현상은 생겨났고 앞으로 더욱 확산할 것이다.


잘게 쪼개는 것만으로는 쓰임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공간 기획이 필요했고 선택한 방법은 가변성이다. 벽 쪽에 붙은 책장과 포도책방을 상징하는 원형 책장을 제외한 평대는 모두 바퀴를 달았고 벽의 일부는 비워두었다. 잠시나마 쓰였던 독립영화관의 스크린을 남겨두었다. 이 매력적인 하얀 벽은 전시장이 되고 콘서트의 무대가 되고 낙서장이 된다. 무엇보다 ‘책방이 끝나고 난 후’ 프로그램 중 하나인 영화관이 될 때 빛을 발한다.


DOMAIN : 각자의 영역, 모두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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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서점에 입점한 점주들의 모습과 각자 개성이 묻어나는 서가의 모습.


장소를 정하고 공간을 계획하고 나니 마지막 숙제가 남았다. 책방의 다양성은 결국 책장에 꽂힌 책이 다양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려는 두 가지였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모일 경우와 헌책만 잔뜩 쌓이는 경우다.


먼저, 책장 주인의 다양성이다. 자칫하면 586 운동권만의 책 무덤이 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공간을 다 만들고 나서도 한참이나 공을 들인 부분이다. 일단 연령별/성별/지역별로 안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몇몇 분은 완판되었다고 돌려보내기도 했고 젊은 청년들에겐 1:1로 읍소까지 했다. 부족한 분야의 책은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책장이 절반쯤 채워진 시점부터는 어떤 책들로 채울 건지 사전에 묻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원래 목표했던 다양성의 절반 정도만 달성했다. 두고두고 노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다음으로, 새 책을 확보하는 일이다. 포도책방의 콘셉트를 정하고 주변에 설명하자 대부분 헌책방으로 인식했고, 실제로도 헌책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행히 점주들의 새 책 주문율이 높아지고 있고, 팔린 헌책의 자리에 새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달 평균 600여 권이 팔리고 현재 1만 권이 있으니 1년이면 새 책과 헌책의 균형이 맞춰지긴 하겠지만 좋은 새 책을 구비하기 위한 노력이 더 구체적이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책방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책방을 하고 나서 가장 놀라기도 하고 보람 있는 것은 포도책방에 입점한 점주들의 ‘꾸미기 경쟁’이다. 읽은 책 중 최고만 골라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설명 글까지 붙여 리본이나 색실로 장식한다. 블라인드 북을 만들기도 하고, ‘어디 가서 아는 척하기 좋은 책’을 선정하기도 한다. ‘읽기와 쓰기’ ‘연대와 페미니즘’ ‘여행과 요리’ 등 큐레이션은 셀 수 없이 늘어난다. 정말 책과 놀기 시작한 것이다.


포도책방과 일반 책방의 가장 확연한 차이점은 책의 진열 방식이다. 시/소설/인문 등 분야별로 진열하는 일반적인 책방과 달리 이곳은 책을 고른 사람별로 진열하고 있다. 같은 책이 여러 곳에 있기도 하고 모든 장르가 뒤섞여 있다. 이 진열 방식은 결과적으로, 책방에 머무는 시간을 늘린다. 책을 찾기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남의 책장 들여다보는 맛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포도책방의 하이라이트는 점주와 손님이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다. 책장을 꾸미는 점주에게 말을 건네고 자연스레 좋은 책을 권한다. 기념사진도 한 컷 찍고 간다.


책방의 모습을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새로운 고민이 던져졌다. 독립서점들과의 관계 설정이다. 규모로는 중형서점이다 보니 위협을 느끼는 시각도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안내소 정도의 역할로 정리 중이다. 포도책방은 개념적으로 독립서점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다. 독립서점의 미니어처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목포 독립서점 두 곳이 공유책방에 입점하기도 했다. 책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더 정제된 큐레이션이 있는 지역의 독립서점들을 소개하고 추천한다. 물론, 독립서점들도 포도책방에 들러보기를 권한다. 아직까지는 밀월 관계이지만 훨씬 더 세심한 관계 설정이 필요해 보인다.


포도책방의 가장 중요한 실험은 ‘큐레이션’이고 ‘컬렉터’의 등장이다. 책은 작가-출판사-도매상-서점을 거쳐 독자에게 전해진다. 포도책방은 서점과 독자 사이에 등장한 컬렉터에 주목한다. 이들은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이자 안내자다. 적게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이 보는 영화는 영화평론가의 영향력이 크고 소비자의 입소문이 중요하지만 1년에 7만 권 넘게 만들어지는 책은 몇몇 베스트셀러 외에 정보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집단지성이 아니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현재 포도책방의 점주가 128명인데 1280명이 되고 1만 2800명이 된다면 어떤 데이터가 쌓이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 사뭇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조반장 (포도책방 대표)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펴내는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의 '잡지 속의 잡지' 계간 [비욘드로컬]에 2025년 6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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